나의 외할머니에게는 3명의 자식이 있었다. 외할아버지께서 전처와 사별한 후에 처녀의 몸으로 시집을 오셔서 외삼촌과 이모, 그리고 막내였던 우리 어머니를 낳았다. 원래 나의 외가집은 꽤나 유복한 집안이어서, 어머니가 시집오기 전까지 집에 상주하던 일꾼 – 당시에는 머슴 – 이 다섯이 넘었다고 한다. 할머니를 모셨던 외삼촌은 대학 시절에는 수재라는 말을 듣던 재원이었는데 술에 손을 대면서 중증의 알콜중독자가 되어 버렸다. 외숙모와 세 명의 자식들은 아예 등을 돌려버렸고, 술은 더 늘어만 갔다. 할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그 많던 할머니의 재산은 외삼촌의 술값으로 탕진되었고, 약삭빠른 외숙모는 이혼한 후에도 외삼촌 곁에 머물면서 부동산의 명의를 하나하나 자기것으로 만들었다. 이모와 나의 어머니, 두 딸은 늘 외삼촌의 행동에 제동을 걸었지만, 막상 세상에서 아들이 최고인줄 아셨던 할머니는 늘 모르는체 넘어가셨다.
1월 24일 늦은 밤 11시, 목 메인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아흔 셋의 연세로 돌아가시기 전 3년이 넘게 치매병동에서 누워만 계셨다. 그 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중풍으로 거동을 하지 못하셨고, 점점 기억이 흐려지시더니, 나중에는 어머니조차 알아보지 못하셨다. 어머니는 할머니께서 치매병동에 들어가신 이후로 내내 병원과 집을 오가며 간호했다. 욕창으로 진물이 흐르는 몸을 닦고, 배설물을 받아내고, 약을 바르면서 3년을 보냈다. 일 년 반 전이었던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부산에 내려왔을때, 오래 버티지 못하실 것 같다고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뵈러 가자는 어머니의 말씀에 그 치매병동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뼈만 앙상해 살아있는 사람 같지 않았던 할머니께서 내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에 현기증이 났었다. 그게 할머니와의 마지막 기억이다.
연락을 받은 다음 날, 부산 영락공원에 안치된 빈소에 도착했다. 너무 오랜 노환 탓인지 손님이 거의 없어 휑하다못해 쓸쓸하기까지 했다. 조문을 하고 앉은지 얼마지 않아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밤 12시가 지나자 마자, 상주인 외삼촌은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집으로 가버렸고 이모란 사람은 상복도 입지 않고 앉아 있다가 살짝 사라져버렸다. 이혼한 외숙모였던 여자는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다시 유산을 노리고 외삼촌 옆에서 살랑대고 있고 그 자식들 – 외조카들- 은 10시 즈음에 부의금을 계산하더니 구석에서 골아 떨어졌다. 막내딸인 어머니와 나, 그리고 동생과 매제만이 빈소를 지키고 있는 그런 꼴이 참 기가 차더라. 어머니는 마지막 발인(發靷)의 그 순간까지도 할머니가 불쌍하다고 대성 통곡하셨다. 외삼촌은 할머니를 부양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할머니의 유산과 할머니가 받는 국가유공자 연금에만 관심이 있어 같은집에 ‘방치’ 했을 뿐이었다. 심지어 외삼촌은 할머니가 남기신 유산을 분할하는 절차에서 조카를 시켜 우리 어머니께 상속 포기 각서를 부탁했다. 유산으로 남긴 대지 위에 외삼촌이 무단으로 집을 지어 살고 있었기에, 외삼촌의 아들놈은 아버지가 그 집에서 물러나면 자신이 아버지를 봉양 할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자식놈은 부모가 하는 것을 보고 배웠을 뿐이니, 놀랄일도 아니다. 단지, 친척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다 이모양 이꼴이니 참… 마음이 착찹했을 뿐…
할머니,
살아계실때 마지막으로 찾아뵙지 못한것이 외손자의 마음에 회한으로 남습니다.
제 어머니가 할머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생전에는 몰라 주셨기에,
목이 매어 우는 제 어머니를 보면서 더 마음이 아픕니다.
보십시오. 진정으로 슬퍼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이젠, 고생은 그만하시고, 좋은 곳에서 편안하게 쉬셨으면 합니다.
짠하네요. 읽는내내 우리 큰댁과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다들 집안내력에 그런 일, 그런 사람 하나씩은 있나봅니다.
인간은 인간 다워야지…
도리를 모르는 인간은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